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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내일로] (14) 인권도시 광주(光州), 그리고 김대중컨벤션센터동부역사(한국여행)/10년 1월 내일로 2016. 2. 9. 18:02
안녕하세요, 경춘선통일호입니다. 설 연휴 잘 보내고 계신가요? 2010년 1월 내일로 여행기 계속 이어나가겠습니다!
아침부터 고기(떡갈비)로 든든한 식사를 마친 저희는 광주시내로 들어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러 왔습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듯이 이 여행기의 시간적 배경(?)인 2010년 1월 기준으로는 기차역 이름은 광주송정역으로 변경된 뒤였지만 지하철역의 이름은 '송정리'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별로 중요하지는 않은 얘기를 이렇게 길게 설명) 그래서 저희는 송정리역에 지하철을 타러 내려갔습니다. 다음 목적지는 바로 김대중컨벤션센터와 그 옆의 5.18 자유공원이었습니다.
광주지하철은 대전, 대구 등의 지하철 승차권과 마찬가지로 토큰형 승차권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개찰구를 나올 때는 저금통에 동전을 집어넣듯이 이 동그랗고 작은 토큰을 기계에 집어넣고 나오는 것이죠^^
광주지하철은 부산, 대구, 인천, 대전 등 다른 광역시 지하철들이 그렇듯, 대형전동차를 사용하는 수도권전철과는 달리 중형전동차를 사용합니다. 그래서 수도권전철만 타다가 이런 지방 광역시 지하철들(인천지하철 포함)을 타면 상대적으로 내부가 좁아보이는 느낌이 있죠.
어쨌든 열차는 곧 김대중컨벤션센터역에 도착했습니다.
김대중컨벤션센터역은 인권테마역사로 꾸며져 있었는데요, 이는 김대중이라는 인물, 그리고 광주광역시의 역사와 큰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광주에서는 역사적으로 권력의 억압으로부터 자유와 인권을 되찾기 위한 많은 노력들이 있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는 두 사건은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과 1980년의 5.18 민주화운동을 들 수 있죠.
먼저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일제 강점기였던 1929년에 일어난 운동이었는데요, 곡창지역인 전라남도 지역에는 그 당시 많은 일본인 대지주들이 부를 누리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대지주들의 일본인 자녀들이 대도시인 광주에 있는 학교로 기차를 타고 통학을 했습니다. 물론 일본인 학생들만 기차로 통학을 했던 것은 아니고 조선인 학생들 역시 기차를 타고 광주로 통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일본인 대지주들의 횡포는 말할 것도 없었지만, 그들의 자녀 역시 조선인들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일이 매우 일상적이었다고 합니다. 이미 조선인 학생들 사이에는 일제의 조선인에 대한 억압 및 무시, 그리고 물자 수탈 등 횡포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해 있었고, 광주 지역의 각급 학교에서는 조선인 학생들 사이에 항일 비밀 단체들이 조직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제에 대한 조선인 학생들의 분노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 있었는데요, 당시 나주 지역 역시 많은 일본인 대지주들이 조선인들을 상대로 횡포를 부리고 있었고, 나주에서 수많은 조선인, 일본인 학생들이 같은 기차를 타고 광주에 있는 학교들로 통학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기차 안에서도 역시 일본인 학생들의 조선인 학생들에 대한 무시와 조롱은 일상적인 일이 되어 있었는데요, 1929년 10월 어느 날 하굣길에 열차가 나주역에 도착한 직후 일본인 남학생들이 조선인 여학생들의 머리를 잡아당기면서 희롱을 했고, 이에 분노한 조선인 남학생들(그 조선인 남학생들 중에는 희롱당한 여학생의 친척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이 일본인 남학생들에게 항의를 시작하면서 그것이 점점 격해져 나주역에서 조선인과 일본인 학생들 수십명 사이의 집단 난투극이 벌어지고 맙니다. 하지만 대다수가 일본인인 경찰들을 일본인 남학생들이 먼저 원인 제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들 편을 들었고 조선인 학생들은 더욱 분노하게 됩니다. 그 뒤에도 광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야구방망이와 죽창 등으로 조선인 학생들을 공격하는 등의 사건이 발생하자 광주 지역 학교를 다니는 조선인 학생들은 참지 못하고 두 차례에 걸친 조직적인 학생항일운동을 벌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3.1운동 이후 전국적으로 가장 큰 규모로 번졌던 항일운동인 광주학생항일운동입니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은 처음에는 광주 지역 학생들만의 운동이었지만, 이 운동은 곧 전국적인 규모로 퍼져나가게 되었고, 이에 학생들뿐만 아니라 여러 신간회 등 독립운동단체들이 참여하게 됩니다. 또한 당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에서도 공개적으로 일제의 조선인 학생 차별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의 기사를 내기도 했었죠. 하지만 결국 이 운동은 일제의 탄압으로 안타깝게 끝나고 말았고, 이 운동에 참여한 수많은 학생들은 무기정학이나 퇴학 등의 처분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은 일제의 억압과 차별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의지를 중고등학생들이 직접 드러내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독립 이후에도 광주지역에서는 잇따라 우리나라에 들어선 독재 정권들에 대한 저항이 꾸준히 있어왔는데요, 그것이 가장 큰 규모로 일어난 것이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입니다. 1979년 10월 26일,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에 의해 오랫동안 군부독재정치를 해왔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피살당한 뒤 우리나라는 잠시 '서울의 봄'이라고 불리는 시기를 맞이했습니다. 군부독재정권이 물러갔으니 민주 정권이 들어설 것이라는 기대가 충만해 있던 시기였죠. 하지만 '서울의 봄'은 채 두 달을 가지 못하고 같은 해 12월에 발생한 12.12 사태로 인해 끝나게 됩니다. 12.12 사태는 육군사관학교 동기들로 이루어진 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에 일어난 군사반란이었는데요,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하나회는 이를 통해 실권을 장악하고 언론을 통제하는 등 또 다른 군부독재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다음 해인 1980년대 봄 이후 하나회는 자신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군부독재를 하는데 방해가 되는 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해 계엄령을 내리고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의 야권 인사들을 감금하고 정치활동 금지령을 내리고 언론통제를 강화하는 등 민주화를 바라는 시민들의 뜻에 반하는 조치들을 내리기 시작합니다.
이에 따라 시민들의 불만은 날이갈수록 높아져만 갔고, 결국 1980년 5월 18일 광주 지역의 대학생들이 신군부의 퇴진 및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 시작합니다. 이에 정부에서는 공수부대를 투입해 시위를 강경진압했습니다. 공수부대는 신군부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는 대학생들을 닥치는대로 살해하거나 폭행했고, 심지어 길을 지나던 광주시민들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살해하거나 마구 폭행하는 등 말도 안되는 일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지나가는 시내버스에 무차별 총격을 가해 무고한 시민들이 사망하는 일도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이러한 일은 며칠 동안 계속되었고, 시민들은 이렇게 잔혹한 방법으로 대응하는 군부에 비폭력 시위로는 한계가 있다는 걸 깨닫고 경찰서 등의 무기고를 탈취해 무장을 하고 시민군을 조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 광주에 있던 외신 기자들을 통해 전세계에 보도되기도 했는데요, 막상 당시 신군부에서는 광주로 통하는 길을 모두 차단하고 국내 언론들을 철저히 통제해 마치 광주에서 북한에서 내려온 군인들과 그에 동조하는 대학생들에 의한 폭동이 발생한 것으로 보도하도록 합니다. 김대중의 선동에 의해 발생했다는 조작된 소문도 열심히 퍼뜨렸고요.(지금도 여전히 그때의 언론 보도를 굳게 믿고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계시더라고요. ㅠ.ㅜ)
일부 광주시민들은 5월 23일부터는 기존의 평화적 시위로 돌아가자는 뜻으로 무기고에서 탈취한 무기들을 자진 반납하기도 했는데요, 반면 군부에서 이렇게 잔혹한 학살을 벌이고 있는 이상 비폭력적인 방법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주장하며 시민군 활동을 지속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시민군들은 당시 전라남도청에서 지속적으로 저항을 이어갔는데요, 결국 5월 27일 계엄군이 광주에 들어와 전라남도청에 있던 시민군들에게 총격을 가하고 전라남도청을 점령하면서 광주민주화운동은 끝나고 말았습니다. 결국 이후 신군부가 자신들의 의도대로 정권을 장악했고 1980년 가을에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 후임 대통령이었던 최규하 대통령을 협박해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전두환이 대통령 권한 대행이 되었고 그 다음 해인 1981년 3월 정식으로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되어 1987년 6월의 대규모 민주화 운동이었던 6월 민주항쟁 이전까지 군부독재를 이어나갔습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그 뒤에도 한동안 광주폭동, 광주소요사태 등으로 불리며 전두환 정권 내내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다가 1987년 6월 민중항쟁 이후 1988년 국회 광주진상특위가 개설되어 진상 조사가 이루어졌고 정부 산하 민주화합추진위원회가 이 사건을 공식적으로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하고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부르면서 오명을 벗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자칭 애국보수' 세력에서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두고 '광주폭동'이라느니 '북한군 특수부대 수백명이 내려와 벌인 소요사태'라느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을 계속하고 있어서 정말 안타까워요. 특히 이 정부 주요 인사에 대한 청문회 자리들에서 '5.18이 민주화운동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견이 있으므로 나는 대답하지 않겠다'라는 등 이상한 말들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정말 화가 납니다. 이미 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을 한지가 벌써 30년이 다 되어 가고 있고, 국가보훈처에서도 5.18 행사를 하고 있건만, 그분들은 도대체 뭐가 못미더워서 5.18에 대한 '이견'을 가지고 계신 건지 모르겠네요. 심지어 '자칭 애국보수' 세력들이 주가 되는 커뮤니티인 '일간 베스트 저장소'에서는 군인들의 강경진압으로 사망한 아들의 관 앞에서 오열하는 어머니 사진을 올려놓고 그 관을 지칭해 '홍어택배'라고 하는 등(홍어는 일베 회원들이 전라도 지역 주민들을 비하하는 의미로 사용하는 말) 상상을 초월하는 글이 올라와 엄청난 사회적 논란이 되기도 했었죠. 이들은 광주민주화운동을 '광주폭동' 등으로 부르며 폄하하고 게시글 추천 버튼을 '산업화', 비추천 버튼을 '민주화'라고 이름붙여놓기도 했습니다. 산업화가 활발하게 진행되던 군부독재 시절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는 어르신(?)들이 이용하는 사이트일까 싶기도 하겠지만 젊은 나이의 회원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도 정말 충격이에요.
어쨌든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민주주의 국가의 시민들로서의 권리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인권마저 군부에 의해 철저히 억압당한 기억을 가지고 있는 광주광역시는 그래서 '인권',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더욱더 소중히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광주광역시는 공식적으로 '인권 도시'를 표방하고 있으며, '사상 및 의사 표현의 자유', '인권 문화와 민주 시민 의식 함양', '노동자의 권리 보장',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최저생활 보장', '성 평등 및 여성의 권리 보장', '장애인 권리 보장' 등의 내용을 담은 '광주인권헌장'을 제정하기도 했습니다. 광주광역시에서는 '민주 인권 포털'이라는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기도 한데요, 이 사이트에서 광주인권헌장의 자세한 내용 및 인권과 관련된 광주시의 역사에 대해서도 자세히 살펴보실 수 있습니다. ([광주광역시 민주 인권 포털 바로 가기])
어쨌든 이와 관련해, 또한 역 바로 근처에 민주화 운동가이자 전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정치인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이름을 딴 '김대중컨벤션센터'가 있어서 그런지 광주지하철1호선 김대중컨벤션센터 역은 이와 같이 인권 테마 역사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광주인권상이라는 것도 제정해서 수상을 하고 있나봐요.
이와 같이 역 곳곳에 인권과 관련한 내용이 붙어 있었습니다.
어쨌든 저와 태영이는 목적지인 김대중컨벤션센터로 가기 위해 역 밖으로 나왔습니다.
역 근처 고시텔 이름이^^ㅋㅋㅋ
김대중컨벤션센터는 국제회의 및 전시회를 위한 시설입니다. 코엑스나 킨텍스 같은 시설인 것이죠. 국내외 여러 유명 가수들의 콘서트나 여러 공연들이 펼쳐지기도 한다고 합니다. 원래 계획 당시에는 '광주컨벤션센터'였는데, '김대중'이라는 인명이 그 의미에 있어서나, 또 홍보에 있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해 '김대중컨벤션센터'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 내에서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존경받는 유명 정치인인데다가, 노벨평화상 수상자이기도 하니까요.
김대중 전 대통령 역시 우리나라의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굉장히 많은 헌신을 하신 분이시죠. 군부독재 정권 시절 야권의 대표적인 인물로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면서 독재정권에 의해 납치, 감금, 투옥, 고문 등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고 저항해 결국 대통령까지 하셨던 분입니다. 많은 비판도 있지만, 여러모로 우리나라의 민주화에 큰 기여를 하셨고, 또한 분단 이후 첫 남북정상회담을 열고 북한 개성에 개성공단을 설치하는 등 한반도 평화를 위한 커다란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도록 해주었던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보수(라고 불리는)세력에 의해 오래전부터 많은 공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군부독재 시절은 말할 것도 없고요, 민주화가 이룩된 뒤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수많은 정치적 공격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노벨 재단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할 때는 당시 우리 정부에서 노벨 재단에 로비를 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기도 했는데요, 이러한 유언비어에 대해 노벨 재단은 '로비가 있긴 있었으나 이상하게도 정치적 반대자 등에 의해 김대중 대통령에게 노벨 평화상을 주지 말라는 로비가 있었다'고 밝히기도 했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현재까지도 일베 등 일부 '자칭 애국보수' 세력에 의해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요, 참 안타까운 것 같아요.한편,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몇 달 후 같은 해 여름에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에는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주요 정치인들이 직접 조의를 표하고 조문단을 파견하기도 했었죠. 그만큼 우리 역사에서 매우 크게 남을 정치인 중 한 명이라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김대중컨벤션센터의 주목적은 전시, 공연시설이지만 '김대중'이라는 이름이 붙은만큼 한켠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 관련 전시물들이 있었습니다.
이 옥중서신은 198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신군부에 의해 이른바 '김대중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청주 교도소에 복역 중 부인인 이희호 여사와 주고받은 편지라고 합니다. 이 옥중서신은 현재 책으로도 출판되어 나와 있습니다.
우와! 요르단의 압둘라 2세 국왕이 선물로 준 것으로 보이는 접시도 있네요^^ 제가 지금 이 여행을 하던 중에는 아랍어를 전공하게 되기는 했었으나 제가 요르단에 가서 공부를 하고 올 줄은 생각도 못하고 있던 때였는데...ㅋㅋㅋ 어떻게 마침 이걸 그때 찍어왔었네요. 아마 아랍어가 적혀 있어서 찍어왔던 것 같아요.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은 것이 오직 남북정상회담 때문만이었다는 일부 반대 세력의 폄훼가 있기도 했었는데, 노벨 재단에서는 그것만이 수상자 선정 이유는 절대로 아니며 그것은 수상자 선정 이유의 일부일 뿐이라고 밝히기도 했었습니다. 수상자 선정 이유는 위의 사진에 잘 나와 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2000년에 수업하다 말고 갑자기 학교에서 지금 텔레비전을 틀고 시청하라는 방송이 나왔던 기억이 나요.ㅎㅎㅎ 그래서 그때 담임선생님, 반 친구들과 함께 이 역사적인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생중계로 지켜보았던 기억이 나네요. 그때는 뭣도 모르고 그냥 보고 있었는데도 굉장히 신기했던 기억이 나요. 그때 제 생각으로는 북한이 예전에 남한을 침략해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었고, 또 예전에는 과거에 북한 무장공비들이 나타나 죄없는 시민들을 마구 죽였던 영동 지방에 살았던 적도 있었기 때문에 남한과 북한은 절대로 친하게 만날 수 없는 사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아주 어릴 때 6.25 전쟁에 대해 아주 실감나게 쓴 소설을 읽은 적이 있어서 매년 6월 25일 새벽만 되면 괜히 북한이 쳐들어오는 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하면서 무서워하기도 하고 그랬었어요.ㅎㅎㅎ) 그런데 남한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이 환하게 웃으며 악수를 하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아요. 곧 통일이 되는 건 아닐까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했었답니다.ㅋㅋㅋ 물론 지금의 남북 관계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천주교 신자였나봐요. 이건 잘 모르고 있었는데...
이것은 노벨평화상 증서와 기념메달입니다.
위의 전시물들은 다 '김대중홀'이라는 한 공간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 옆에는 이렇게 광주광역시를 홍보하는 부스(?)도 있었어요.
아침에 먹고 온 송정떡갈비.^0^ 아 또 먹고 싶다.ㅠ.ㅜ
근데 이때 전시회나 공연 같은 건 저희 21살(2010년 당시) 남자애들이 볼만한 것은 없었고 모두 어린이들을 위한 체험시설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김대중컨벤션센터는 이렇게 구경을 마치고 나왔습니다.
다음 목적지는 바로 근처에 위치하고 있던 5.18 자유공원!
To Be Continued...
2016. 2. 9. 경춘선통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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